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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께서는 경남 남해 삼동면에서 출생하시어, 20세 되던 해인 1954년 정월에 출가하셨습니다.
불공(佛供) 드리러 절에 자주 다니던 친척을 따라서 동네에서 십 리쯤 떨어진 곳에 있던 해관암(海觀庵)이라는 조그마한 사찰에 우연히 가셨다가, 조계종 초대 종정이셨던 설석우(薛石友) 선사를 친견한 것이 출가의 인연이 되셨습니다.
석우 선사께서 스님을 보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생활도 좋지만 그보다 더 값진 생활이 있으니, 그대가 한번 해보지 않겠는가?"
"무엇이 그리 값진 생활입니까?"
"범부(凡夫)가 위대한 부처가 되는 법이 있네.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수행의 길을 가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래서 스님께서는 몇 일간 해관암에 머물면서 수행하는 스님들의 생활을 유심히 살펴보시게 되었는데 세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청정한 수행생활을 하는 스님들의 삶에 큰 환희를 느껴 그길로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허락을 얻은 후 출가하시게 되었습니다.

남해의 조그마한 암자에서 시작된 행자 수업(行者修業)은 큰스님 시봉에다가 공양주 소임, 나무를 해오고 채소를 가꾸는 등 해야 할 일들이 종일 연속이었습니다. 그러한 행자 생활을 6~7개월 한 뒤 하안거(夏安居) 해제일(解制日)이 되어 제방 선방에 다니면서 십여 년간 수행해오던 선객 스님 몇 분이 석우 선사께 인사드리러 왔다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석우 선사께서는,
"오늘 내가 자네들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하여 보게. 옛날 중국의 삼한(三漢) 시절에는 글자 운자(韻字) 하나를 잘 놓음으로 인해서 과거에 급제하던 때가 있었네. 이것은 그 당시 시험에 나왔던 문제인데, '일출동방대소(日出東方大笑), 즉 해가 동쪽에서 떠올라 크게 웃는 모습이 어떠하더라.' 하는 이 글귀에 운자 하나를 놓아보게."
하시고는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은 나 '아(我)'자를 놓아서 재상에 등용되었는데 자네들은 어떤 자(字)를 놓아보겠는가?"

선객 스님들 중에 대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자 석우 선사께서는 신출내기 행자였던 진제 스님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네가 한마디 일러보아라."
이에 스님께서 대뜸 답하셨습니다.
"저는 없을 '무(無)'자를 놓겠습니다."
해가 동쪽 하늘에 떠올라 밝은 빛으로 온 세상을 비추지만 그 모습에는 호리(豪釐)의 상(相)도 없다는 뜻으로 '무(無)'자를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석우 선사께서는,
"행자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다."
라고 하시며 매우 흡족해 하셨습니다.

해관암에서 열 달 가량 지내신 뒤 석우 선사께서 해인사 선방 조실스님으로 가시게 되자, 스님 역시 해인사로 가서 사미계를 받고 강원(講院)에서 경전(經典)을 익히셨습니다. 그 후 다시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동화사로 가시게 되었던 석우 선사의 부름을 받고 동화사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석우 선사를 시봉하던 중에 한 번은 대중스님 이십여 분과 함께 팔공산 상봉을 오르셨다가, 우연히 빈 토굴을 발견하고 대중스님 몇 분과 함께 일주일 동안 용맹정진을 하고 돌아오신 일이 있었습니다. 석우 선사께서는 당장에,
"어른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제멋대로 온갖 것을 다 하려고 든다."
하시며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러나 참학의지(參學意志)로 가득 차있던 스님의 심중을 간파하시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화두를 주셨습니다.

그 후 스님께서는 동화사를 떠나 운수행각(雲水行脚)의 길에 오르셨는데, 그때가 스님의 세수 24세였습니다. 처음 머무르셨던 곳은 태백산에 위치한 동암(東庵)이라는 한 작은 암자였습니다. 모든 반연(攀緣)을 끊고 단신(單身)으로 각고정진(刻苦精進) 해보겠다는 각오로 그 빈 암자를 택하여 자잘한 피감자로 하루 세 끼를 때우면서 정진생활을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두 달을 지내셨는데 마침 그 밑에 있는 큰 절 각화사의 주지를 맡게 된 도반스님이 와서 보고는 하루 세 끼 끼니 꺼리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어려운 생활을 걱정하여 함께 내려가자고 자꾸만 청하는 바람에 다시 바랑을 짊어지고 선산 도리사(桃李寺)로 옮겨가셨습니다. 도리사에서 일고여덟 분의 수좌스님들과 여법(如法)히 정진하시면서 동안거 한 철을 나시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견성(見性)해야겠다는 일념에 마음이 달아, 오로지 정진에만 힘을 쏟으셨습니다. 저녁 9시에 방선(放禪)하면 대중들이 다 잠들기를 기다리셨다가 살며시 혼자 일어나 두어 시간 더 정진하시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빈틈없는 수행생활을 하신지 두 달이 조금 지나서였습니다. 참선 도중에 반짝 떠오르는 조그만 지견(知見)을 가지고서 '알았다'는 잘못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참구하던 것을 다 놓아버리고는 해제일만 기다리셨는데 해제하면 가서 점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석우 선사께서 열반(涅槃)에 드셨다는 부고가 날아와서 동화사로 가 다비(茶毘)를 치르셨습니다. 그 후 경남 월내(月內) 묘관음사(妙觀音寺)에 주석하시고 계시던 향곡(香谷)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향곡 선사는 대뜸,
"일러도 삼십방(三十棒)이요 이르지 못해도 삼십방이니, 어떻게 하려느냐?"
하셨습니다. 스님께서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시자 향곡 선사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남전(南泉) 선사의 '참묘(斬猫) 법문'에 조주(趙州) 선사께서 신발을 머리에 이고 나가신 것에 대해서 한마디 일러보아라."
스님께서는 그 물음에도 답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알았다'고 자신만만해 있었는데 그만 여지없이 방망이를 맞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스님께서도 선지식(善知識)에 대한 신(信)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때라 자신의 생각을 쉽게 놓아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방(諸方)을 행각(行脚)하시면서 당시 선지식으로 이름이 나있던 고승(高僧)들을 거의 모두 참방(參訪) 해보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선지식은 아니라고 하시지만, 또 어느 선지식은 긍정하는 듯이 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모두 한결같이 불긍(不肯)했었더라면 직하(直下)에 '알았다'는 망념(妄念)을 놓아버리시고 다시 참학인(參學人)의 자세로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탓에 '너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 하는 잘못된 인식이 박혀 2년여 세월을 어정쩡하게 허비해 버리셨습니다.

그러다가 26세 때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안거(冬安居) 정진을 하시던 어느 날 햇볕이 따스하게 비치는 마루 끝에 앉아 자신을 반조(返照)해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고인(古人)들과 같이 당당하여 낱낱의 법문을 확연명백하게 아는가? 누가와서 묻는다고 하더라도 의기당당(意氣堂堂)하고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답을 할 수 있는 그러한 혜안(慧眼)이 열렸는가?' 하고 스스로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대답은 여지없이 부정이었습니다.

'도둑을 잘못알아 자식으로 삼고 돌덩어리를 금으로 삼는다면 결국 내 손해가 아니겠는가?' 하며 거짓에 사로잡혀 허송세월 해왔던 자신을 반성하시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잘못된 소견(所見)을 놓아버리고 백지로 돌아가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리라는 결심이 서셨습니다. 그리고 이전과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눈밝은 선지식을 의지하여 공부해야만 한다는 인식을 분명히 갖게 되었습니다.

선사께서 제방 선지식들을 참방(參訪)하시던 과정에서 향곡 선사만은 제방의 다른 선지식들이 쓰지 못하는 '언하(言下)에 흑백을 분명히 가려내는 법(法)'을 쓰시던 것을 보셨기 때문에 향곡 선사에게 의지하여 스승으로 삼고 공부를 하시기로 마음을 정하고 해제하자마자 향곡 선사 회상을 찾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선사께 예배드리며,
"이 일을 마칠 때까지 스님을 의지해서 공부하려고 왔습니다."
하시니 향곡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이 심오하고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대도(大道)를 네가 어찌 해결할 수 있겠느냐?"
"신명(身命)을 다 바쳐서 해보겠습니다."
라고 스님께서 대답하니 향곡 선사께서 새로 '향엄상수화' 화두를 주셨습니다.

※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 어떤 사람이 아주 높은 나무 위에서 입으로 나무가지를 물고 손으로 가지를 잡거나 발로 가지를 밟지도 않고 매달려 있을 때, 나무 밑에서 어떤 사람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물었다. 답하지 않으면 묻는 이의 뜻에 어긋나고, 만약 대답한다면 수십 길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자기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찌해야겠느냐?

이 화두를 들고 2년여 동안 신고(辛苦)하셨습니다. 결제와 해제를 상관하지 않고 일체 산문출입(山門出入)을 하지 않으시면서 화두 참구 외에는 그 어떤한 것도 용납하지 않고 궁구(窮究)하셨던 것입니다.

화두일념으로 두문불출하고 정진을 하셨는데 28세 때 되던 어느 날, 새벽 예불을 드리러 법당에 올라가시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일어서는 찰나에 화두가 타파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종전의 동문서답(東問西答)하던 미(迷)함이 걷혀지고 비로소 진리의 세계에 문답의 길이 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오도송을 지어 향곡 선사께 바치시기를,

     
這箇拄杖幾人會 (자개주장기인회) ....... 이 주장자 이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꼬
     
三世諸佛總不識 (삼세제불총불식) .......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다 알지 못함이로다.
     
一條拄杖化金龍 (일조주장화금룡) ....... 한 막대기 주장자가 문득 금빛 용으로 화해서
     
應化無邊任自在 (응화무변임자재) ....... 한량없는 용의 조화를 자유자재 하는구나.

이에 향곡 선사께서 물음을 던지셨습니다.
"너 문득 금시조(金翅鳥:용을 잡아먹고 사는 전설의 새)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려느냐?"
"몸을 움츠리고 당황해서 뒤로 세 걸음 물러가겠습니다[屈節當胸退身三步]."
라고 답을 하자 향곡선사께서,
"옳고 옳다."
하시며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송고백측(頌古百則)으로 유명한 설두(雪竇) 선사께서도 다른 공안(公案)에는 다 확연명백하셨으나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 공안에 막혀 다시 20년을 참구하셨는데, 스님도 이 공안에는 막혔습니다.

※ 일면불 월면불(一面佛月面佛) : 하루는 마조 선사에게 원주(院主)가 아침에 문안(問安)을 드리며, “밤새 존후(尊候)가 어떠하십니까?” 하니, 마조 선사가 “일면불(一面佛) 월면불(月面佛)이니라.”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 공안(公案). 일면불은 수명이 1천8백세지만 월면불은 불과 일일일야(一日一夜)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화두를 가지고 다시 참구하여 5년여 동안 온갖 전력(全力)을 다 쏟다가 해결하니, 마침내 고인들께서 중중(重重)으로 베풀어 놓으신 온갖 차별법문(差別法門)에 걸림이 없이 상통되었습니다. 오도송을 읊으시기를,

     
一棒打倒毘盧頂 (일봉타도비로정) ....... 한 몽둥이 휘두르니 비로정상 무너지고
     
一喝抹却千萬則 (일할말각천만측) ....... 벽력같은 일 할에 천만 갈등 흔적없네
     
二間茅庵伸脚臥 (이간모암신각와) ....... 두 칸 토굴에 다리펴고 누웠으니
     
海上淸風萬古新 (해상청풍만고신) ....... 바다 위 맑은 바람 만년토록 새롭도다.

그 후 스님의 세수 33세이던 1967년 정미년(丁未年) 하안거 해제법회일에 월내 묘관음사 법당에서 향곡 선사께서 법문을 하시기 위해
상당(上堂)하시어 묵좌(默坐)하고 계시는데 스님이 나와 여쭈었습니다.
"불조(佛祖)께서 아신 곳을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불조께서 아시지 못한 곳을 선사님께서 일러 주십시오."
"구구는 팔십일이니라."
"그것은 불조께서 다 아신 곳입니다."
"육육은 삼십육이니라."
이에 스님이 아무 말 없이 예배드리고 물러가니, 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법상에서 내려오셨습니다.

다음 날 위의를 갖추고 다시 선사님을 찾아가 여쭙기를,
"불안(佛眼)과 혜안(慧眼)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衲僧)의 안목입니까?"
하니, 향곡 선사께서 답하셨습니다.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
師姑元來女人做]"
그러자 스님이,
"오늘에야 비로소 선사님을 친견했습니다."
하니, 향곡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관(關)!"
스님이 이렇게 답하자, 향곡 선사께서
"옳고, 옳다."
하시며, 태고 보우 선사로부터 경허-혜월-운봉-향곡 선사로 이어져온 임제정맥(臨濟正脈)의 법등(法燈)을 부촉하시고 '진제(眞際)'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를 내리셨습니다.

     
付眞際法遠丈室 (부진제법원장실) ....... 진제 법원 장실에 부치노라

     
佛祖大活句 (불조대활구) ....... 부처님과 조사의 산 진리는
     
無傳亦無受 (무전역무수) .......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라.
     
今付活句時 (금부활구시) ....... 지금 그대에게 활구법을 부촉하노니
     
收放任自在 (수방임자재) ....... 거두거나 놓거나 그대 뜻에 맡기노라.

그 후 1971년에 해운대 앞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장수산 기슭에 해운정사(海雲精寺)를 창건하시고 상·하선원(上·下禪院)을 개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최상의 진리인 선법(禪法)이 많은 사람에게 널리 전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시변(市邊)에다가 선원을 세워 선의 대중화와 생활화를 주창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40년 이상 회상(會上)을 열고 계시는 것은 지음자(知音者)를 만나 부처님의 최상승법인 임제정맥의 법등을 부촉하시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