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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이란?

참선(參禪)이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자기의 ‘참나’를 발견하는 수행법입니다. 참나 안에 우주의 모든 진리가 다 있습니다. 부처님도 참나를 알아 위대한 부처님이 되셨고, 모든 도인들도 참나를 알아 위대한 도인이 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참나만 알면 위대한 부처가 되고 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참선이란 '마음의 고향'에 이르는 수행법입니다. 사람 사람마다 마음의 고향에는 팔만사천 지혜가 갖춰져 있고, 만 가지 복과 덕이 구족해 있건만 알지 못하는 까닭에 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이 화두를 들고 오매불망 씨름해서 일념이 지속되는 과정만 오면 천사람 만사람이 마음의 고향에 이르러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과 함께 억만년이 다하도록 편안한 진리의 낙을 누리게 됩니다.

참선은 왜 하는가?

첫째, 나고 죽는 윤회의 고통에서 영구히 벗어나고
둘째, 지혜를 계발하여 나고 날 적마다 출세와 복락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이 무엇이냐?

사람에게 가장 큰 일은 나고 죽는 이 일(生死大事)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왕궁의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설산에 들어가 고행을 하셨고, 역대의 모든 도인들도 이 일을 밝히기 위해 출가 수도하셨습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이 태어나고 죽는 데는 언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가 과거에 무수히 많은 생을 받아왔고, 이번 생에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을 받게 될 터인데, 나고 죽는 이 윤회의 굴레 속에서 받는 고통이야말로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한 고로 모든 사람들이 이 문제(生死大事)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바세계에 온 것이지, 달리 다른 일이 없습니다. 이 큰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사람의 몸을 받은 값어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나고 죽는 이 고통의 굴레에서 영구히 벗어나 세세생생 열반의 낙을 누릴 수가 있느냐?

오직 부처님의 최상승법인 선법을 눈밝은 선지식으로부터 바르게 지도받아, 일상생활 속에 꾸준히 참선수행을 연마하여 각자 자기의 ‘참나’를 바로 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신난득(人身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사람의 몸 받기 어렵고, 최상승법 만나기 어렵습니다.
비유하건대, 사선천(四禪天) 하늘에서 떨어뜨린 바늘이 사바세계 제일 작은 겨자씨에 꽂히는 것과 같이 사람의 몸 받기가 어렵다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 몸을 못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영혼으로서 이 우주 공간에 머물러 애착과 집착에 사로잡혀 수십년 수백년이 흐르는 수도 있고, 축생에 떨어진다는가, 아귀, 곤충 이러한 데 떨어지면 다시 사람 몸을 받는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난 김에 금생에 결정코 이 일을 해결해야 됩니다.

옛 도인들이 말씀하시길, “사람들이 빈한하게 사는 것은 지혜가 짧아 그렇다.”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잘 살 수도 없고 출세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부모가 높은 자리와 많은 재산을 물려줘도 그릇이 적어서 지키지를 못합니다. 참선을 통해 지혜를 계발하면 남보다 앞서는 선견지명이 생겨 세상의 출세와 성공은 자연히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밝은 지혜는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느냐?

이 부모에게 나기 전 ‘참나’를 발견하면 그 가운데 밝은 지혜가 다 갖춰져 있습니다. 이 밝은 지혜는 한 번만 뚜렷이 밝혀놓으면 억만년이 다하도록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밝아 있습니다. 지혜를 밝히는 이 참선이야말로 행복을 가져다주는 근본입니다.

바른 참선법

◎ 바른 심심

금생에 요행히 사람몸을 받고 선지식을 만나 화두를 타서 참선을 하게 되었으니, 마치 사선천(四禪天)에서 떨어뜨린 바늘이 사바세계의 겨자씨에 꽂힌 것과 같이 천만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금생에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고 몸을 버리면 앞으로 무한한 생을 나고 죽으며 천갈래 만갈래의 윤회고통을 또 받아야 하리니,
참으로 두렵고 아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금생에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화두를 타파해서 윤회고통을  벗어나 대장부의 활개를 쳐야 되겠다는 철석같은 의지,
이것을 바른 신심이라 합니다.
 

◎ 바른 자세

우리가 이 참선 수행법을 익히는 데 있어서는 먼저, 좌선시(坐禪時)에 참구하는 바른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앉아 있는 자세를 보면 화두를 제대로 들고 있는지, 혼침 망상에 떨어져 멍하게 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참선하는 바른 자세는,

     - 평좌(平坐:반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 가슴과 어깨를 활짝 펴고,
     - 허리를 반듯이 하고,
     - 양손을 모아 배꼽 밑에다 붙이고,
     - 눈은 보통으로 뜨되, <눈을 감으면 안 됩니다.>
     - 시야로 화두를 꼬나보지 말고, <화두는 생각으로 챙기는 것이지 눈으로 챙기는 게 아닙니다.>
     - 눈 앞 2미터 아래에다 화두 생각을 두어야 합니다. <2미터 아래에다 두면 바른 자세가 유지되고 상기가 방지됩니다.>

만약 앉는 자세가 바르지 않아서 허리가 구부정하게 되거나 가슴이 오므라지거나 하면, 앉아서 여러 시간 참구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화두 참구는 맑은 생각에 무한한 정신집중이 되어야 하는데, 자세가 흐트러진 상태에서는
정신집중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앉아서 1시간 보내는 것조차도 아주 지겹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부좌를 하고 반듯하게 앉는 자세가 먼저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화두를 눈 앞 아래에다 두고 참구해야 합니다. 머리에다 두고 화두를 참구하다 보면 힘이 들어가서 상기(上氣)가 되는데,
기(氣)가 위로 올라가게 되면 머리가 무거워져서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화두를 눈 앞 아래에다 두고, '부모에게 나기전에 어떤것이 참나던고?'라든가 '만 가지 진리의 법은 하나로 돌아가고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라든가 각자 선지식께 받은 화두를 간절히 챙겨야 합니다.
 

◎ 바른 참구

바른 자세가 갖추어졌으면 다음으로는 화두를 바르게 참구해야 합니다.
개울물에 비친 달을 보듯이 멍하게 화두를 관하고 있다든가, 화두를 지켜 달아나지 않게 붙들고 있다든가,
진언하듯이 화두 제목을 외우는 것 등은 화두를 바르게 참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홀연히 비명(非命)에 간 삼대독자 외아들을 생각하는 부모의 심정과도 같은 간절한 마음에서,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 "어떤 것이 참나던고?" ...... "어떤 것이 참나던고?" ......
이렇게 하루에 천번 만번 의심으로 밀어줘야 합니다.

이렇게 수천, 수만 번 의심으로 밀어주다 보면 "참의심"이 발동 걸리는 때가 오는데, 그때는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화두 한 생각이 쭉 흘러가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농촌에 방아찧는 기계 모터에 시동을 걸 때, 수십 번 푸드득 거리다가 어느 순간 시동이 걸리면 몇 시간이고 잘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루에 천번 만번 의심을 밀어주는 것은 참의심이 시동이 걸리라고 밀어줍니다.

화두를 쭉 달아서 챙기는 데 무슨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참의심이 시동이 걸리게 하는 데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 건성으로 10년을 하는 것보다 한 번을 하더라도 뼈골에 사무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건성으로 100만 번을 해도 참의심은 시동 걸리지 않습니다. 뼈골에 사무치게 챙기면 한 번 챙기는 데 문득 참의심이 돈발할 수도 있습니다.
참의심이 시동 걸리면 화두를 다시 챙기지 않아도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화두 한 생각이 흘러갑니다.

한 생각이 성성하게 흐르는 그 가운데 의심이 철두철미해야 되고, 의심이 철두철미한 가운데 화두 전체가 분명한 상태로
흐르는 물과 같이 흘러가야, 보고 듣는 데 끄달림이 없게 됩니다.

가족이 함께 한방에서 밥을 먹는다든가 한화잡담(閑話雜談)을 하고 있는 중이라도,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할 때는
옆 사람의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습니다. 그보다도 더 강도있게 화두를 챙기면서 의심하고 의심하면서 챙길 것 같으면,
보고 듣는 것이 다 마비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아주 간절한 한 생각만
흐르는 물과 같이 끊이지 않고 흐르게 됩니다.

이렇게 간절한 화두 한 생각만 흘러가다가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나, 소리를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이 남과 동시에 억만년 전 자기의 참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진리의 문에 들어가서 팔만사천 법문이 흉금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불법의 진수(眞髓)인 선(禪)을 참구하는 바른 참선 수행법입니다.

발원의 중요성

금생에 이 일을 결정코 해결하기 위해서는, 항시 조석(朝夕)으로 예불할 때 부처님 전에 발원(發願)을 해야 합니다.

"화두가 일념이 지속이 되어서 대오견성(大悟見性) 하여지이다."

항시 이렇게 발원을 하면 모든 습기(習氣)와 헛점이 다 차단됩니다.

예전 도인 스님들께서도 수행하실 때 항시 원(願)을 세우셨습니다.
"우선지식(遇善知識)하여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 활연대오(豁然大悟)해서
속불혜명(續佛慧命) 광도중생(廣度衆生) 하여지이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이러한 발원(發願)을 해서 불과(佛果)를 이루셨고, 역대 조사 스님들께서도 그러하셨고,
지금 대도(大道)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납자(衲子) 스님들도 그렇게 해야 대도를 성취할 수 있고,
처사님, 보살님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심(信心)과 용맹(勇猛)과 발원(發願), 이 세 가지가 항시 공부와 일치되어서 모든 헛점을 다 씻어 없애 버려야
공부가 순일(純一)되어 일념(一念)이 지속되게 됩니다. 일념이 지속되기만 하면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마음광명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만 열어 젖히면, 그 마음 가운데 팔만 사천 지혜가 다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다 부처가 되고 부처님과 동일한 위력을 발(發)할 수 있게 됩니다.

생활속의 참수행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참선하는 바른 자세, 바른 화두 참구법을 익혀서 바르게 정립되면, 좌선(坐禪)에 국집(局執)하지 말고
앉으나 서나 일을 하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시 화두를 참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위산(潙山) 선사께서 상당(上堂)하시어 이러한 법문을 하셨습니다.
"사람 사람마다 각자 모양 없는 참사람이 있어서 항시 면전(面前)에 출입자재(出入自在)하는데,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이를 보느냐?"
대중 가운데 한 청신녀(淸信女)가 이 법문을 듣고서,
'사람마다 모양 없는 참사람이 있어서 일상생활 가운데 쓰고 있다는데, 나는 왜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고?'
하는 분심(憤心)이 일어 오매불망(寤寐不忘) 의심하고 참구하고, 의심하고 참구했습니다.
이 보살은 세간살이 형편이 너무 어려워 시골 장터에서 빵을 구워 팔아서 생활을 꾸리며 살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화두일념을 지어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몇 년 동안을 간절하게 골수에 사무치도록 공부한 결과, 하루는 빵을 굽는 도중에 홀연히 화두 관문(關門)이
타파되어 모양 없는 참사람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빵소쿠리를 팽개쳐 버리고 위산 선사를 찾아가니, 선사께서 벌써 간파(看破)하시고 물으셨습니다.
"어떤 것이 모양 없는 참사람이냐?"
그러자 보살이 송(頌)으로 답하기를,

     
三頭六臂大力將 (삼두육비대력장) ....... 머리는 셋이요, 팔은 여섯 가진 대장사가
     
一拳擊破泰和山 (일권격파태화산) ....... 한 주먹으로 태화산을 쳐부숨에
     
分破和山千萬重 (분파화산천만중) ....... 천겹 만겹의 태화산이 두 동강이 나니
     
萬年流水不知春 (만년유수부지춘) ....... 만 년이나 흐르는 물은 봄을 알지 못하더라.

이렇게 깨달은 경지를 송(頌)하자, 위산 선사께서 들으시고는,
"그대가 바로 알았느니라."
하고 인가(印可)하셨습니다.

이 청신녀가 바로 유도바(有道婆) 보살입니다.

이렇듯 시끌벅적한 시장바닥에서 장사를 하면서 살아가는 여인네가 화두 관문을 뚫어 일대사(一大事)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이 참선공부라는 것이 오로지 마음으로 지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승속(僧俗), 남녀(男女), 어떠한 경계(境界), 그 어떠한 형상(形相)과도 무관한 것이 이 참선법입니다.

예전에 능행파(陵行婆), 대산바자(台山婆子), 영조(靈照), 그리고 지금 들어보인 유도바(有道婆) 같은 분들은 모두
속인(俗人)이면서 여자인 몸으로 도(道)를 깨쳤는데, 그 기봉(機鋒)이 아주 날카롭고 자유자재했습니다.

예전 도인 스님들께서는 조용한 데서 공부를 익히는 것보다 시끄러운 가운데서 익히면 그 힘이 몇 배나
더 수승(殊勝)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공부는 팔풍(八風:이(利), 쇠(衰), 훼(毁), 예(譽), 칭(稱), 기(譏), 고(苦), 락(樂))이 불어닥칠 때,
죽음에 다다라 사지(四肢)가 찢어질 때 써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편안하고 고요할 때만이 아니라 지극히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순일(純一)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방(禪房)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바른 법문을 듣고 바른 지도를 받아서 걸음걸음 화두를 놓지 않으면,
부엌이나 안방이나 사무실이나 만원 버스 등, 가는 곳마다 일등 선방인 것입니다.
이러한 공부법을 익히지 않고, 앉아 있을 때는 화두가 있는 듯하다가 서면 달아나고 걸어가면 없어져 버리는,
그러한 공부를 짓는다면 백 생(百生)을 하더라도 진리의 눈이 열릴 수가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좌선법(坐禪法)을 익히는 것은, 앉아서 참구하는 것이 참선을 배우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좌선(坐禪)에 익어지면 다음에는 동중(動中)에 무르익어져야 합니다. 가고 오고 말하고 일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가운데 익어져서,
화두 한생각이 24시간, 365일 흐르는 물과 같이 지속되는 여기에 실다운 정진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잠시라, 어느새 칠팔십이 되어 병고(病苦)가 닥쳐오고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때 가서야 일생사를
돌이켜 보고 "헛살았구나!" 하고 후회를 합니다. 그러나 그때 가서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부터 한시간 한시간 화두참구에 열(熱)과 성(誠)을 다해, 정진의 신심(信心)을 쌓고 쌓아서, 의심을 짓고 지어 보십시오.
그리하여 일념(一念)이 현전(現前)하여 지속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고 듣는 것을 다 잊어 버리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시간이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일 년이고 흐르고 흐르다가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하면 활연(豁然)히 열리게 됩니다.

이 선법(禪法)은 천생 만생 인신(人身)을 받는다 해도 만나기가 어렵고, 바른 지도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인들께서도, 중생은 다겁생(多劫生)에 지어온 잘못된 습기에 중중(重重)으로 얽혀 있어서,
이 정법(正法)을 만나기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귀한 법을 만난 김에, 금생에 각고정진(刻苦精進)하여 나고 날 적마다 진리의 법 가운데서 복락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