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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제 법원(1934~ ) 스님은 20세에 해인사에서 조계종 초대 종정이셨던 설석우(薛石友) 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였습니다.

석우 선사께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화두를 받아 제방을 운력하며 빈틈없이 참구하던 중, 어느 날 반짝 떠오르는 지견(知見)을 가지고 '알았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점검을 받기 위해 월내(月內) 묘관음사(妙觀音寺)에 주석하고 계시던 향곡(香谷) 선사를 찾아가니, 선사께서 대뜸 물으셨습니다.

"일러도 삼십방(三十棒)이요 이르지 못해도 삼십방이니, 어떻게 하려느냐?"
스님이 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향곡 선사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남전(南泉) 선사의 '참묘(斬猫) 법문'에 조주(趙州) 선사께서 신발을 머리에 이고 나가신 것에 대해서 한마디 일러보아라."

스님은 그 물음에도 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알았다'고 자신만만했는데 그만 여지없이 방망이를 맞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선지식(善知識)에 대한 신(信)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때라, 자신의 생각을 쉽게 놓아버릴 수가 없어 제방(諸方)을 행각(行脚)하며 2년여 세월을 어정쩡하게 허비해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26세 때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안거(冬安居) 정진을 하던 어느 날 문득 거짓에 사로잡혀 허송세월한 자신을 반성하고, 모든 잘못된 소견(所見)을 놓아버리고 백지로 돌아가서 다시 공부를 시작하리라는 결심으로 해제하자마자 향곡 선사 회상을 찾아갔습니다.

선사께 예배드리며,
"이 일을 마칠 때까지 스님을 의지해서 공부하려고 왔습니다."
하시니 향곡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이 심오하고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대도(大道)를 네가 어찌 해결할 수 있겠느냐?"
"신명(身命)을 다 바쳐서 해보겠습니다."
라고 스님께서 대답하니 향곡 선사께서 새로 '향엄상수화' 화두를 주셨습니다.

※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 어떤 사람이 아주 높은 나무 위에서 입으로 나무가지를 물고 손으로 가지를 잡거나 발로 가지를 밟지도 않고 매달려 있을 때, 나무 밑에서 어떤 사람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물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묻는 이의 뜻에 어긋나고, 만약 대답한다면 수십 길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자기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찌해야겠느냐?

이 화두를 들고 2년여 동안 신고(辛苦)하셨습니다. 결제와 해제를 상관하지 않고 일체 산문출입(山門出入)을 하지 않으시면서 화두 참구 외에는 그 어떤한 것도 용납하지 않고 궁구(窮究)하셨던 것입니다.

화두일념으로 두문불출하고 정진을 하셨는데, 28세 때 되던 해 가을 드디어 '향엄상수화' 화두의 관문을 뚫어냈습니다. 그리하여 종전의 동문서답(東問西答)하던 미(迷)함이 걷혀지고 비로소 진리의 세계에 문답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오도송을 지어 향곡 선사께 바치기를,

     
這箇拄杖幾人會 (자개주장기인회) ....... 이 주장자 이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꼬
     
三世諸佛總不識 (삼세제불총불식) .......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다 알지 못함이로다.
     
一條拄杖化金龍 (일조주장화금룡) ....... 한 막대기 주장자가 문득 금빛 용으로 화해서
     
應化無邊任自在 (응화무변임자재) ....... 한량없는 용의 조화를 자유자재 하는구나.

이에 향곡 선사께서 물음을 던지셨습니다.
"너 문득 금시조(金翅鳥:용을 잡아먹고 사는 전설의 새)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려느냐?"
"몸을 움츠리고 당황해서 뒤로 세 걸음 물러가겠습니다[屈節當胸退身三步]."
라고 답을 하자 향곡선사께서,
"옳고 옳다."
하시며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송고백측(頌古百則)으로 유명한 설두(雪竇) 선사께서도 다른 공안(公案)에는 다 확연명백하셨으나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 공안에 막혀 다시 20년을 참구하셨는데, 스님도 이 공안에는 막혔습니다.

※ 일면불 월면불(一面佛月面佛) : 하루는 마조 선사에게 원주(院主)가 아침에 문안(問安)을 드리며, “밤새 존후(尊候)가 어떠하십니까?” 하니, 마조 선사가 “일면불(一面佛) 월면불(月面佛)이니라.”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 공안(公案). 일면불은 수명이 1천8백세지만 월면불은 불과 일일일야(一日一夜)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화두를 가지고 다시 참구하여 5년여 동안 온갖 전력(全力)을 다 쏟다가 해결하니, 마침내 고인들께서 중중(重重)으로 베풀어 놓으신 온갖 차별법문(差別法門)에 걸림이 없이 상통되었습니다. 오도송을 읊으시기를,

     
一棒打倒毘盧頂 (일봉타도비로정) ....... 한 몽둥이 휘두르니 비로정상 무너지고
     
一喝抹却千萬則 (일할말각천만측) ....... 벽력같은 일 할에 천만 갈등 흔적없네
     
二間茅庵伸脚臥 (이간모암신각와) ....... 두 칸 토굴에 다리펴고 누웠으니
     
海上淸風萬古新 (해상청풍만고신) ....... 바다 위 맑은 바람 만년토록 새롭도다.

그 후 스님의 세수 33세이던 1967년 정미년(丁未年) 하안거 해제법회일에 월내 묘관음사 법당에서 향곡 선사께서 법문을 하시기 위해 상당(上堂)하시어 묵좌(默坐)하고 계시는데 스님이 나와 여쭈었습니다.
"불조(佛祖)께서 아신 곳을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불조께서 아시지 못한 곳을 선사님께서 일러 주십시오."
"구구는 팔십일이니라."
"그것은 불조께서 다 아신 곳입니다."
"육육은 삼십육이니라."
이에 스님이 아무 말 없이 예배드리고 물러가니, 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법상에서 내려오셨습니다.

다음 날 위의를 갖추고 다시 선사님을 찾아가 여쭙기를,
"불안(佛眼)과 혜안(慧眼)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衲僧)의 안목입니까?"
하니, 향곡 선사께서 답하셨습니다.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
師姑元來女人做]"
그러자 스님이,
"오늘에야 비로소 선사님을 친견했습니다."
하니, 향곡 선사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관(關)!"
스님이 이렇게 답하자, 향곡 선사께서
"옳고, 옳다."
하시며, 태고 보우 선사로부터 경허-혜월-운봉-향곡 선사로 이어져온 임제정맥(臨濟正脈)의 법등(法燈)을 부촉하시고 '진제(眞際)'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를 내리셨습니다.


▲ 향곡 선사께서 진제 선사에게 내리신 친필 전법게

     
付眞際法遠丈室 (부진제법원장실) ....... 진제 법원 장실에 부치노라

     
佛祖大活句 (불조대활구) ....... 부처님과 조사의 산 진리는
     
無傳亦無受 (무전역무수) .......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라.
     
今付活句時 (금부활구시) ....... 지금 그대에게 활구법을 부촉하노니
     
收放任自在 (수방임자재) ....... 거두거나 놓거나 그대 뜻에 맡기노라.

그 후 1971년에 해운대 앞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장수산 기슭에 해운정사(海雲精寺)를 창건하시고 상·하선원(上·下禪院)을 개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최상의 진리인 선법(禪法)이 많은 사람에게 널리 전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시변(市邊)에다가 선원을 세워 선의 대중화와 생활화를 주창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40년 이상 회상(會上)을 열고 계시는 것은 지음자(知音者)를 만나 부처님의 최상승법인 임제정맥의 법등을 부촉하시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