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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은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祖師)들께서 깨치신 바인 불법 진리의 골수 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후 삼칠일(21일) 간을 깊이 생각하시고는,
“제법(諸法)의 적멸상(寂滅相)은 가히 말로써 베풀 수 없는 것이니, 차라리 법 을 설하지 않고 빨리 열반에 드는 것이 나으리라.” 하셨습니다.

선은 그 어떠한 언어나 문자로도 설할 수 없는 것이어서 개구즉착(開口卽錯:입 을 열면 그르침)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 조사께서는 부처님의 일대장교와 역대 조사들의 설법을
‘양머리를 매달아 놓고 개고기를 파는 것(懸羊賣狗)’ 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셨던 ‘정법안장 열반묘심’의 선의 진리는 교(敎) 밖 에 따로 전하여, 오직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밀전되어 왔으니,
이렇게 상속하는 도리야말로 종문(宗門)의 생명이요, 불조의 명맥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마하가섭, 가섭존자로부터 아난, 아난존자로부터 상나화수, 이렇게 전전상승(傳傳相承)하여 온
불조정전(佛祖正傳)의 선은 28조 보리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습니다.

중국에 전파된 선법은 육조 혜능 선사에 이르러 크게 융성했고, 혜능 선사 이후로 계속 분파(分派)되어
임제종, 위앙종,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의 오종(五宗)을 이루었습니다. 이 오종 가운데 위앙ㆍ법안ㆍ운문 3종은 차츰 쇠퇴하여
그 법통이 단절되었으나, 임제ㆍ조동 2종은 후대에 더욱 번성하였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법맥도 임제종의 법맥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선법이 전래된 때는 통일신라시대로, 사조 도신 선사로부터 법을 부촉받은 조사를 비롯하여,
오종이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법을 전수받아 와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산선문 법계는 신라시대에 잠시 흥성하다가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점차 쇠퇴되어 갔습니다.

이렇듯 선가(禪家)의 침체기였던 고려 말엽에, 태고 보우 스님이 각고정진 끝에 선지(禪旨)를 깨닫고 송(宋)으로 건너가서
임제정맥의 법등(法燈)이신 석옥 청공 선사로부터 인가받고 법을 부촉 받아 불조정전 57조로 우리나라 종조(宗祖)가 되셨습니다.

태고 보우 선사께서 조선 초에 환암 혼수 선사에게 전법하시니, 이로부터 우리나라 선종은 임제정맥을 면밀히 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는 숭유배불 정책으로 불교의 수난시대였고, 선법은 조선 중ㆍ후기 이후로 크게 위축되어
근 백여 년 동안 동면(冬眠)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 출세하셔서, 이 땅에 다시 선법을 부흥시키고 실낱같이 이어져오고 있던 선맥에 활로를 여신 분이 바로
위대한 선지식, 경허(鏡虛) 선사입니다.

경허 선사 밑에서 훌륭한 제자들이 배출되어 네 분이 법을 전해 받았으니,
혜월(慧月)ㆍ만공(滿空)ㆍ침운(枕雲)ㆍ한암(漢岩) 선사입니다. 그 가운데 혜월 선사의 법맥이 운봉-향곡 선사로 이어져 내려와
현재, 태고 보우 선사의 22세손이며 불조정전 79조이신 진제 선사에 이르렀습니다.

경허 스님은 1849년 8월 24일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子動里)에서 송두옥(宋斗玉)씨와 밀양 박씨 부인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처음 이름은 동욱(東旭)이요,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며, 먼저 출가하여 공주 마곡사에서 득도한 백씨(伯氏)는
태허 성원(泰虛性圓) 스님이십니다. 태어난 뒤 사흘 동안 울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다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9세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서 경기도 청계산 청계사에 가서 계허(桂虛) 대사에 의하여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습니다.

14세 때 마침 한 선비가 절에 와서 여름을 지낼 적에 여가로 글을 배우는데, 눈에 거치면 외우고, 듣는대로 뜻을 해석할 만큼
문리(文理)에 크기 진취가 있었습니다. 그해 가을에 계허 스님의 천거로 계룡산 동학사 만화 화상(萬化和尙)을 찾아가
일대시교(一大時敎)를 수료하고, 23세 적에 대중의 물망으로 동학사에서 개강(開講)함에 사방에서 학인들이 물처럼 몰려왔습니다.

대중들의 요청으로 동학사 강원의 강단에서 강의를 하다가 여름 어느 날, 은사(恩師)스님을 뵈러 가던 길에 폭우를 만나
비를 피하던 중 호열자로 인하여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있는 현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무상(無常)이 빠르고
생사(生死)가 신속함을 느꼈는데, 밤이 되어 하루 묵을 곳을 찾다가 어느 처사집에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서 하루 머무는데 집주인 처사가 경허 스님에게 묻기를,
"스님네들은 일생동안 시주만 받아먹고 살다가 죽게되면 소가 된다는데..."
하는 말에 대꾸 한마디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경허 스님은 강원의 강백으로서 모든 학인을 지도하고 부처님의 교리를 원만히 다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사의 언덕에
큰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실로 불교의 깨달음이란 실참실오(實參實悟)해야만 비로소 부처님 지혜에
이를수 있는 것이라고 느끼고 그 길로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흩어보내고 폐문(閉門)한 뒤 좌선(坐禪)을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공안이 알음알이로 해결되어 버렸는데, 영운(靈雲) 선사의 '나귀 일이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한다.
[驢事未去 馬事到來]'는 법문은 도무지 그 뜻을 알 수가 없어 이것을 화두로 삼고 두문불출하시면서 졸음이 오면 날카로운
송곳으로 살가죽을 찌르고 칼을 갈아 턱 밑에 대놓고서 수마(睡魔)를 물리치며 용맹정진하였습니다.

그렇게 정진하시기를 석달 째, 화두 한 생각이 순일하여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았습니다. 육근육식(六根六識)의 경계가 다
물러가고 화두 한 생각만 또렷해져 있던 어느 날, 우연히 바깥에서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이 들려오는 순간,
여지없이 화두가 타파되었습니다. 이 때가 31세셨습니다.

오도(悟道)를 한 후, 송(頌)하시기를,

     
忽聞人語無鼻孔 (홀문인어무비공) .......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頓覺三千是我家 (돈각삼천시아가) ....... 문득 깨달아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다 나의 집일세
     
六月燕岩山下路 (유월연암산하로) .......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野人無事太平歌 (야인무사태평가) .......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그리고 선사께서는 이으신 법(法)의 전등연원(傳燈淵源)을 청허 휴정(淸虛休靜) 선사의 12세 손(孫)이며,
환성 지안(喚惺志安) 선사의 8세손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이때부터 제방(諸方)에 선풍을 진작시키니 각처에 선원(禪院)이 개설되고 걸출한 선객(禪客)과 수행납자(修行衲子)들이
처처에서 많이 모여들어 적막하기만 하던 조선의 선불교는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습니다.

오도 후, 참으로 의발 전할 이 없음을 탄식하시더니, 1885년 선사 세수 37세 때, 비로소 눈 밝은 납자를 얻으셨으니 그 분이 바로
혜월 혜명 스님입니다.

경허 선사께서는 말년(1905년 57세)에 세상을 피하고 이름을 숨기고자 갑산(甲山)ㆍ강계(江界) 등지에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호를 난주(蘭州)라 하여,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쓰고, 바라문의 몸을 나타내어 만행(萬行)의 길을 닦아
진흙에 뛰어들고 물에 뛰어들면서 인연따라 교화하셨습니다.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입적하시니, 세수(世壽)는 64세, 법랍(法臘)은 56세였습니다.

시적(示寂) 직전에 마지막으로 일원상(一圓相)을 그린 위에 써놓은 열반게송(涅槃偈頌)이 있습니다.

     
心月孤圓 (심월고원) ....... 마음 달이 홀로 둥그니
     
光呑萬像 (광탄만상) ....... 그 빛이 만 가지 형상을 삼켰도다.
     
光境俱忘 (광경구망) .......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復是何物 (부시하물) .......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여름에 천화(遷化) 소식을 듣고 제자 만공(滿空) 스님과 혜월(慧月) 스님이 열반지 갑산에 가서 법구(法軀)를 모셔다 난덕산(難德山)에서 다비(茶毘)하여 모셨습니다.